구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타파스>를 만들고 있는 현PD😎입니다.
이번 주 화요일은 3·1절이었어요. 1919년 3월 1일, 일제의 무단 통치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벌였던 3·1 운동을 기념하는 날이죠.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이라면 다들 알고 계시겠죠?😅
하지만 1919년 3월 1일 이후 3·1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3·1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은 있는데, 추상적인 이미지만 떠오를 뿐 구체적인 상황은 잘 생각나지 않았습니다.(부끄럽습니다…😥)
이번 주 ‘타파스’는 103년 전 봄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형벌을 받고 세상을 떠났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 청년들은 왜 세상을 떠나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일제는 이들을 비롯한 조선 민중을 어떻게 탄압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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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시작과 전개, 그리고 탄압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수많은 인파가 종로 일대로 모여듭니다. 사회 지도층, 종교인, 노동자, 농민, 학생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만세 운동은 전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다음 달인 4월까지 약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운동에 참여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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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의 전개 양상을 나타낸 지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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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개된 만세 운동에 일제는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로 답했어요. 수많은 시민들이 일본 헌병과 경찰에게 목숨을 잃거나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은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과 형벌을 당해야만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태형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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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터지고 녹아내리는 형벌, 태형
‘태형’은 몽둥이 등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형벌입니다. 반복해서 당할 경우 피부가 터지고 괴사하는 것은 물론, 세균 감염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끔찍한 형벌이에요.😰 그런데 일제는 1912년 제정한 ‘조선태형령’을 통해 이 끔찍한 태형을 하루에 30대씩 최대 90대까지 집행할 수 있도록 했어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제외하고 오직 조선인에게만 말이에요.😡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도 체포되어 태형을 당했습니다. 조선총독부 통계를 보면 총 10,592명의 만세 운동 참가자에게 태형을 선고했다고 하는데, 일제의 공식 통계가 이 정도니 실제 피해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돼요. 이렇게 태형을 당한 이들은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받거나, 끝내 후유증을 못 이겨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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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으로 숨진 두 청년의 마지막 소원
당시 조선에 체류중이던 외국인들은 일제의 태형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린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도 이들 중 하나였어요.
스코필드는 평안북도 강계 지역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태형을 당한 피해자 4명의 사진과 증언을 모아 보고서로 작성했는데, 이들 중 2명은 끝내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뉴스타파는 일제의 태형 만행으로 사망한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영국과 미국 문서고, 그 밖의 여러 기록과 자료를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 이들이 김명하와 탁창국라는 이름의 10대, 20대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어요. 김명하와 탁창국은 강계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2천 장이 넘는 태극기를 제작했을 정도로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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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하, 탁창국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사진과 인적사항. (출처 : 미국 장로교 역사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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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하와 탁창국. 강계 지역 학교를 졸업하고, 누구보다 조국의 독립에 앞장섰던 두 청년은 일제의 잔혹한 태형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당시 김명하를 치료했던 간호사는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어요.
“마취에서 깨며 김 군은 쉴 새 없이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습니다.
사망 당일 오후 내내 김 군은 손가락 끝을 물어뜯으려 했습니다.
그는 곧 숨을 거뒀고, 저는 나중에서야 그가 연신 손가락을 물어뜯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앞서 간 애국자가 그러했듯, 그도 자기 손가락을 뜯어 피로 독립선언을 쓰려 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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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유
이후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끝에 조선태형령은 1920년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3·1 운동 참가자들이 태형으로 고통받거나 사망한 다음이었어요. 김명하와 탁창국, 두 청년이 그토록 바라던 독립은 그로부터 25년 지난 1945년에야 비로소 찾아왔습니다.😥
지난 2월 24일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주일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우크라이나를 응원하고 러시아를 규탄하는 목소리, 그리고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어요. 우크라이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고 있어요. 멀지 않은 곳에서 강대국의 침략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다시 한 번 ‘독립’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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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해지는 키워드 한 입
#제암리 학살 사건
-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의 교회에서 일본군이 조선인 민간인을 계획적으로 학살한 사건입니다.
- 제암리 인근에서는 1919년 3월 말부터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일본 헌병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사망자까지 나오게 되자 주민들은 더욱 격렬히 반발합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마을 주민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뒤, 문을 잠그고 불을 질러서 학살을 자행했어요. 심지어 문을 부수고 나오려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기도 했습니다.
- 이 사건은 일본군에 의해 은폐될 뻔했지만, 학살 현장을 찾은 스코필드 박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학살 명령을 내렸던 일본군 장교는 근신 등 가벼운 징계를 당했을 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해요.😡
#프랭크 스코필드
- 영국에서 태어난 캐나다인 선교사이자 수의사로, 1917년 일제 치하의 조선에 건너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3·1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게 돼요.
- 3·1 운동 소식을 해외에 알리고, 은폐될뻔 한 제암리 학살 사건을 밝혀내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직접 지은 한국 이름인 ‘석호필’로 유명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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