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이후 한 달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와 이상민 장관 해임을 두고 격론이 오가는 가운데,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침묵을 깨고 공개 발언에 나서고 있습니다. 지금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정부의 사과와 책임 있는 태도, 그리고 진짜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 지난 12월 1일,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시민단체가 책임자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는 유가족들의 요구대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고 있을까요. 158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그 날로부터 한 달이 넘게 흘렀지만, 정부의 대책은 유가족의 요구와 다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번 주 ‘타파스’는 이태원 참사 이후 정부가 내놓고 있는 대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참사 원인은 ‘제도의 부재’? 헛도는 정부 대책
참사 이후 한 달동안 정부는 ‘제도 정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3일 행정안전부는 이상민 장관 주재로 ‘다중밀집 인파 사고 예방 안전관리 대책 회의’를 열었는데요. 다음 날 행정안전부는 회의 결과를 세 가지 대책으로 정리해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에 보냈습니다. 행정안전부가 지자체에 보낸 세 가지 대책은 아래와 같아요.
① 인파 사고 예방이 필요할 경우 경찰의 협조를 받아라 ② 대규모 밀집행사가 예상되는 경우 민관 협력체계를 구축해 운영하라 ③ 크라우드 매니지먼트(crowd management) 기술을 개발하라
문제는 이 대책들이 참사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에요. 우선 첫 번째 대책은 참사 직후 이상민 장관 스스로가 ‘경찰을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라고 발언했던 것과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또 두 번째 대책은 사실상 이미 재난안전법에 있는 내용을 반복한 것에 불과해요.
세 번째 대책은 드론 등 첨단 기술을 사용해서 위험을 사전에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다는 것인데요. 물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에요. 하지만 전국의 지하철 역사, 야외 공연장, 축제 행사장 등 인파 사고가 우려되는 모든 장소에 이런 체계를 도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법과 조례는 이미 인파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 예측될 경우 경찰과 지자체 등이 협력해서 안전 대책을 세우고,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신속하게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설치해서 각 정부 부처가 재난에 대응하도록 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참사 이전부터 당일까지 이 시스템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58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미 있는 시스템이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있는 매뉴얼 또 만들기… 경찰 대혁신 TF가 하는 일
이태원 참사 이후 경찰청은 참사의 재발을 막겠다는 취지로 ‘경찰 대혁신 태스크포스(TF)’를 꾸렸습니다. 이 TF의 주된 목표는 바로 2014년 경찰청이 발행한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 매뉴얼’ 을 정비하는 것인데요.
▲ 2014년 경찰청 경비과가 발행한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 매뉴얼’. 매뉴얼의 전체 내용은 뉴스타파 데이터포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매뉴얼에 이미 경찰이 취해야 하는 안전 조치가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매뉴얼 내용 중 이태원 핼러윈 데이에 적용할 수 있는 사항들을 몇 가지 꼽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주최자가 제출하는 안전관리 계획 말고도 관련 첩보나 현장 답사를 토대로 행사의 위험성을 인지한다.
주변 지하철역에 참가자가 몰릴 가능성은 없는지, 이동로가 좁거나 경사가 가파르지는 않은지, 위험 요소들을 따져보고 경력을 배치한다.
극단적으로 혼잡해진 상황에서는 인파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안전 통로를 확보하고, 지하철 무정차 통과를 통해 인파 분산을 유도한다.
위 매뉴얼대로 경찰은 이미 첩보를 통해 행사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참사 당일 현장에는 경찰기동대 등 경력이 배치되지도 않았고, 지하철 무정차 통과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즉 매뉴얼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은 ‘현재 매뉴얼은 주최자가 있는 행사에 대한 안전관리 매뉴얼’ 이라며 ‘주최자가 없는 경우까지 포괄하는 매뉴얼을 제작하겠다’ 라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은 매뉴얼이 없어 책임을 못 지니, 매뉴얼을 만들어 다음부터는 상황에 맞춰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 경찰의 입장인 셈입니다.
‘책임 묻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가이드라인’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진짜 책임자를 처벌하라’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경찰은 ‘제도·매뉴얼의 부재’만 탓하며, 책임자 처벌보다는 이미 있는 제도를 손보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부와 경찰의 대책이 이렇게 헛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참사 이틀 후인 10월 31일, 윤석열 대통령은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상민 장관 등을 대통령실로 불러 회동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주최자가 없는 자발적 집단 행사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인파사고 예방 안전관리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즉 ‘주최자가 없는 행사’에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으니 정부의 책임도 없다, 앞으로 시스템을 잘 마련하면 된다는 말이죠.
▲ 11월 11일, 윤석열 대통령이 동남아 순방길에 오르기 전 성남 공항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뉴시스)
이러한 대통령의 발언은 정부가 이태원 참사에 대처하는 ‘가이드라인’이 됐어요.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이태원 참사 이후 각종 ‘TF’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경찰 대혁신 TF,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단장을 맡은 범정부 국가안전시스템 개편 TF 등이 이렇게 생겨난 TF입니다.
이들 TF에서 여러 대책을 쏟아내겠지만, 과연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요. 만약 다른 재난이 발생한다면 그 때 정부는 ‘시스템의 부재’를 탓하지 않고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일 수 있을까요? 뉴스타파는 앞으로도 ‘이태원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